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리앙 디블랭 (문단 편집) === [[하틴 전투]] === 그해 기와 동맹관계인 [[르노 드 샤티용|르노 드 샤티용(Renaud de Châtillon)]]이 무슬림 상단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살라딘은 보복을 선언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였다. 기는 병력을 소집하여 이에 맞서려 하였으나 발리앙은 강대한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면서 반대하였고, 역시 같은 의견을 지닌 트리폴리 백작 [[레몽 3세]]가 나서서 중재를 하려 하였다. 하지만 르노의 처벌을 요구하는 살라딘과 그럴 수 없다고 맞서는 기의 의견차이로 인해 중재는 대실패. 결국 이런 대치상태는 1187년 초까지 계속되었다. 이에 발리앙은 [[성전기사단]], [[구호기사단]], 시돈의 르노(Renaud de Sidon)과 함께 트리폴리로 향하였다. 하지만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살라딘의 아들 알 아프달에게 발렸으며, 뒤늦게 도착한 발리앙은 패전사실을 듣고 즉시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철수하였다. 역시 패전사실을 보고받은 레몽 3세도 뒤늦게 기와 손을 잡고 [[예루살렘 왕국]]을 지원[* 당시 레몽 3세는 알 아프달이 트리폴리 백국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알 아프달의 군대가 영지를 통과할 수 있도록 승인한 상태였다.]하기로 하였다. 기는 살라딘의 병력을 쫓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로 진군하였으나, 황량한 대지였던 까닭에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지속적인 공격으로 고전하였다. 결국 기가 이끄는 예루살렘군은 [[하틴 전투]]에서 살라딘의 군대에게 포위 섬멸당해 기 는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. 이 전투에는 발리앙도 참전하고 있었으며 에데사의 백작 [[조슬랭 3세]](Josselin III d'Édesse)와 함께 후미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패배하였고, 패색이 짙어지자 레몽 3세, 시돈의 르노와 함께 티레로 철수하였다. 이 과정에서 놀라운것이 발리앙이 위치한 후미에는 집중적인 공격으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격전 중이었다. 하지만 놀랍게도 발리앙은 그걸 뚫고 퇴각하는데 성공한다. 이 과정에서 그의 전술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. 그리고 [[보두앵 5세]]의 삼촌인 몽페라의 콘라드[* 콘라드의 형이 보두앵 5세의 아버지이자 시빌라의 일찍 사별한 첫 남편이었다.]와 협력하여 티레의 방어를 맡게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